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온 3세 (문단 편집) === [[성상 파괴 운동]] === [[파일:Clasm_Chludov (1).jpg]] 외침과 반란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내어 지위가 공고해지자 황제는 성상 문제를 공개적으로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조짐을 보이더니 '''726년에 <성상 파괴령>을 내린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의 정문이자 구리로 되어있다고 해서 이름붙은 할키 문[* Χαλκῆ ,Chalke, Bronze, 동(銅)]위의 금으로 만든 예수 성상이 제국 전체의 성상들 중 제1호 성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떼어내고 단순한 십자가로 교체하게끔 것이 726년이고[*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the_Byzantine_Empire|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중, 'Leo III, ordered the removal of the great golden icon of Christ that decorated the Chalke Gate or vestibule to the Great Palace of Byzantium. "Chalke" means bronze in the Greek language and the Chalke Gate derived its name from the great bronze doors that formed the ceremonial entrance to the Great Palace.' 및, 'The primary icon of all Byzantium was the golden Christ over the Chalke Gates.', 'Leo's order for the removal of the golden Christ over the Chalke Gates and its replacement with a simple cross was motivated by the need to mollify the rising tide of popular objection to all religious icons.'], 제국 전역에서 성상을 파괴해야 함을 규정해서 칙령을 내린 것은 730년이었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the_Byzantine_Empire|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중, In 730 AD, Leo III issued an edict which made iconoclasm official policy throughout the Empire.] 옛날부터 동방 테마들은 우상 숭배 금지를 외치며 성장한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기에 황제도 이 같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성상을 공경하는 자국이 성상을 배제한 이슬람에게 계속 지니까 '그래, 우리도 성상 배제 한 번 해보자'는 생각도 작용했다고 한다. 또한 대내적인 이유도 있었다. 첫째, 외침이 이어지고 피난민과 이민족이 제국으로 유입되어 사회가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국가의 구심점이 될 국가 종교의 정체성을 확고히 필요가 있었다. 둘째, 동양의 황제처럼 정교일치가 아니라 종교 권력과 영향력을 나눠 경쟁하던 로마의 황제로선 성상을 옹호하는 교회를 신학 논쟁으로 공격하여 영향력을 낮출 수 있었다. 셋째, 성상을 옹호하는 주교를 [[네스토리우스파]] 등의 이단으로 몰아 교회 재산을 손쉽게 몰수하여 국가 재정에 보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50여년 동안의 성상 파괴 운동 끝에 성상 공경은 70여 년 후인 787년의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 신앙으로 인정받았으나, 성상 파괴주의가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843년으로[* 이 성상 파괴운동의 종말 및 성상 공경으로의 복원을 '정교 승리'라고 한다.] '''100년을 넘게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라벤나 총독부와 총독부의 통제를 받던 이탈리아인들은 여전히 성상을 공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 정부에 반발했고, 727년에 반란을 일으켜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라벤나 총독)|파울로스]]를 죽이고 사실상 제국에서 독립해버렸다. 730년에 실시된 제국 전국 차원의 센서스까지 로마 교황 주도로 거부했으니 말 다 했다. 결국 이는 [[콘스탄티노스 5세]] 재위기에 있었던 라벤나 총독부의 해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투시아에서 [[티베리오스 페타시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3년간 황제를 자칭하다가 진압되기도 했다. <성상 파괴령>에 완강하게 저항했던 로마 교황에 대한 보복으로 종전에는 로마 교구에 속했던 [[일리리쿰]]과 현대 [[그리스]]의 대부분을 74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로 옮긴 것도 레온 3세였다. 동방 정교회를 통상 '''그리스 정교회'''라고 하지만, 제국 전역에 걸쳐 교구가 설정되었던 때부터[* 넓게 잡으면 325년 니케아 공의회, 좁게 잡아도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5대 총대주교(Pentarchy) 시스템 정립 때부터.] 이 때까지 현대 그리스의 대부분은 로마 교구, 즉 가톨릭 교회에 속했다는 것은 재미있다.[* [[파일:Pentarchy_565_CE.png]] 지도를 보면 [[테살로니키]]도 로마 교구에 속해 있었다. 현대 그리스 기준으로는 동북쪽 트라키아 쪽 일부만이 당시 콘스탄티노플 교구에 속해 있었다.] 사실 원래 라벤나 주둔군으로는 이탈리아에서의 교황의 권위가 워낙 세져서 불가능해지니 중앙군을 보내서 이탈리아를 진압하려고 했지만 그 선단이 중간에 좌초되었다. 그래서 무력 집행은 안 되겠으니까 그 대신 교황의 관할 구역을 줄인 것이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m.wikipedia.org/wiki/Leo_III_the_Isaurian|Leo III the Isaurian]] 중, 'in 740 Leo retaliated by transferring Southern Italy and Illyricum from the papal diocese to that of 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The struggle was accompanied by an armed outbreak in the exarchate of Ravenna in 727, which Leo finally endeavoured to subdue by means of a large fleet. But the destruction of the armament by a storm decided the issue against him;'] 여하튼 이 때문에 레온 3세는 수백 년간 이루어진 '''[[동서 대분열]]'''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결국 제국 및 정교회가 성상 옹호로 돌아갔기 때문에, 업적에 비해서 후대에 '저 사람이 성상 파괴를 시작해서 깽판 쳤었지'하면서 나머지 잘했던 것들까지도 같이 저평가를 받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한편 이탈리아와 거의 같은 727년 즈음에 소아시아 남부의 카라비시아노이 테마와 그리스 지역의 헬라스 테마에서 [[아갈리아노스 콘토스켈레스]] 등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탈리아와는 달리 조기에 진압이 된 것으로 보인다.[* Cyril Mango의 '[[https://books.google.co.kr/books?id=ZZ82psJ2pLEC&pg=PA139&lpg=PA139&dq=hellas+theme+727&source=bl&ots=9NH4ZIGuXX&sig=ACfU3U0VSDctbeQ2TDZSyW3azLLLHNDmlw&hl=en&sa=X&ved=2ahUKEwitnZuE3qvzAhXIa94KHXPjCbsQ6AF6BAgMEAI|The Oxford History of Byzantium]]'의 139p 중, 'In 727 the Carabisian Theme and the Theme of Hellas rebelled against him, possibly because of the edict; but he defeated them.']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